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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읽는 책]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

나는 민트초코의 맛이 싫다. 민트에는 묵직하고 진한 초코의 농도가 완전 안 어울린다. 초코는 입을 꼬옥 다물고 혼자서 음미하는 허밍 같은 맛이다. 반면 민트는 입술을 오므려 바람을 만들어 부는 휘파람 같은 맛. 휘파람 같은 민트에는 가볍고 옅고 투명한 농도의 것들이 어울린다. 이를테면 민트사탕, 민트껌, 민트티 같은 것들. 묵직하고 진한 농도와 여운을 나 홀로 허밍 하듯 음미하는 초콜릿에, 휘파람 같은 민트라니. 휘유우우, 경솔한 맛에 바람이 샌다.   김겨울 외 『아니요, 그건 빼주세요』   취향 존중 시대에 맞는 책이다. SNS엔 ‘좋아요’가 넘쳐나지만 ‘이 음식이 싫어요’ 외치는 이들이 모였다. 앉은 자리에서 후다닥 읽히는 짧은 글 모음집. 인용문은 민트초코를 싫어하는 ‘반민초파’ 고수리가 썼다. “세상에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다”는 페르난도 페소아를 인용하며 “초콜릿이 너무 좋아서 민트초콜릿이 너무 싫다”고 했다. 300% 공감한다.   ‘국민 간식’ 치킨이 싫은 사람, 몰캉한 외양과 달리 ‘노란 스펀지에 설탕 뿌린 맛’ 같은 마시멜로가 싫은 사람, 어린 시절 오빠 도시락 싸고 남은 김밥 ‘꽁다리’ 한 접시에 대한 서러운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 사연이 제각각이다.   ‘민초 반민초’ ‘부먹 찍먹’처럼 “그것에 대한 호불호 자체가 하나의 밈으로 자리 잡은 음식들. 각자의 취향에 소속감을 느끼며 편을 갈라 티격태격 다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움 흉내를 내는 새끼 고양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파인애플이 들어간 하와이안 피자가 싫다는 하현의 글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민트사탕 민트껌 민초 반민초 초콜릿 이상

2025-04-09

[문장으로 읽는 책] 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저축한 돈에 손대야 할 때, 신용카드 대금이 불어날 때 ‘무일푼’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가난의 수치심 때문에 우리가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가난을 겪어본 사람, 우리에게 굴욕을 주지 않을 사람뿐이다. (…) 에이미는 내가 거리에서 잔돈을 구걸하던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깨달아온 사실을 확인해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도와주는 사람은 본인이 가난을 겪어본 사람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로렌 허프 『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대부분을 처벌과 굴욕, 고통과 거부를 피하려고 여러 겹의 필터를 쌓으면서 보냈다. 나라는 존재가 잘못되었다는 가르침을 계속 받아왔기에 덜 나답게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임시변통으로 사용하는 다양한 벨트와 주걱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단언하건대, 따귀는 더 나쁘다. 손바닥이 날아오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귀는 굴욕적이다.” 솔직함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자전적 에세이집이다. 어려서 악명 높은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자라며 세계 여러 곳을 떠돈 저자는 미 공군에 입대하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전역을 강요받는다. 이후 홈리스가 되었다가 클럽 기도, 택시 기사, 케이블 기사 등을 전전한다. 광신과 편견, 폭력과 학대, 가난으로 점철된 삶의 기록을 담담하고 위트있게 털어놓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술술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2021년 미국 베스트셀러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학대 가난 기사 케이블 굴욕 고통

2025-04-02

[문장으로 읽는 책] 치유일기

걷기를 할 때 중요한 것은 마음을 걸음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눈은 앞을 보고 있지만 마음의 눈은 걸음에 둔다. 어떤 생각에 골똘히 빠지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지 않고 오로지 걸음걸음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보이는 풍경, 들리는 자동차 소리는 그저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일 뿐 내 마음의 고요함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몰입의 순간에 만나는 고요함이다. 감정의 출렁임이나 고통의 회오리가 없는 고요함. 평온함. … 강변을 걸으며 나는 서서히 삶을 재건하고 있었다. 길에서도 걷고 마음으로도 걷고. 세상 모든 길이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박은봉 『치유일기』   프리랜서 작가이던 저자에게 어느 날 죽음 같은 불안증과 우울증이 찾아왔다. 이제는 삶이 좀 편안해지리라 믿었던 50대 초반이었다. 그렇게 무너진 삶을 9년 만에 다시 세운 기록을 책으로 펴냈다.   답은 걷기와 마음챙김이었다. 불행이란 ‘감정’을 자신과 분리하며, 오직 ‘지금 여기’ 숨 쉬며 살아있는 나에게 집중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오늘만 살 수 있다면 좋겠다. 1년 전 오늘이 기억나고 4년 전 오늘이 기억나서 괴롭다. 좋은 기억은 없고 괴로운 기억뿐이네. 마음을 가다듬고 호흡에 집중해 본다. 과거의 기억으로 달려가는 생각을 붙잡아 지금 여기로 갖다 놓는다. 내가 살아야 할 곳은 지금 여기이지 과거가 아니다.”   “호흡, 알아차림, 걷기는 모두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연습”이다. 과거에 사로잡히고 미래를 걱정하며 번뇌가 많은 이들도 귀 기울여볼 얘기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치유일기 자동차 소리

2025-03-26

[문장으로 읽는 책] 일인칭 단수

“네. 저는 어디까지나 원숭이지만, 절대 천박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내 것으로 삼는다-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분명 성적 욕망이 깔린 악행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깨끗하고 플라토닉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저는 마음속에 있는 그 이름을 그저 남몰래 혼자 사랑할 뿐입니다. 마치 부드러운 바람이 초원을 가만히 훑고 지나가듯이.”   “흐음.”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하긴, 어찌 보면 궁극의 연애라고도 할 수 있겠어.” “네, 그것은 어찌 보면 궁극의 연애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궁극의 고독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동전의 양면인 셈이지요. 그 둘은 꼭 달라붙어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하루키가 지난 2020년 내놓은 책이다. ‘나’라는 일인칭 단수 시점으로 그린 8편의 사랑 얘기, 6년 만에 펴낸 단편집이다. 최근 들어 하루키 월드에 심드렁해 하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천만에, 하루키는 하루키다.   인용문은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의 일부다. 온천 료칸의 종업원으로 일하는 ‘말하는 원숭이’와 만난 나는 염력을 사용해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훔치는 원숭이의 사랑법을 듣는다. 사랑할수록 외로워지는 사랑의 모순을 그린 우화다.   ‘돌베개에’의 주인공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란 여자의 말을 떠올린다. 모든 건 먼지처럼 다 사라졌고, 여자가 지어 보낸 몇 편의 하이쿠만이 남았다. “벤다/베인다/돌베개/목덜미 갖다대니/보아라, 먼지가 되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일인칭 단수 일인칭 단수 사랑 얘기 무라카미 하루키

2025-03-19

[문장으로 읽는 책] 가장 외로운 선택

과거에는 ‘빈곤’과의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인정’과의 싸움입니다.…더욱 청년들을 어렵게 하는 것은 이 모든 청년들의 심리적 고통이 사회적 구조와 산업구조의 영향이라는 사회적 이해보다 개인의 노력, 개별 가족의 능력 부족으로 간주되다 보니, 더 자신을 착취하고 자신에 대한 심리적 증오와 애증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김현수 외 『가장 외로운 선택』   “지금의 청년 세대. 어려선 마음고생, 커가면서는 외로움에 시달리다가, 고독사로 죽는 첫 세대.” “몸의 고생에서 마음의 고생으로 고생 방식이 바뀌어가고 있고, 경쟁은 훨씬 더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너무 암울한 진단인가. 책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2020년 20대 사망자의 절반(54.3%)가량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전년 대비 13%나 증가했다. 자살은 한국 10~30대 사망 원인 1위다.   한국·미국·일본 성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자살 생각이 가장 높았고, 빈곤을 개인 책임이라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살에 허용적 태도를 보였다. “청년들의 자살증가는 ‘문제의 개인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문제의 사회화’가 필요한 문제까지도…모두 자기 문제로 가져오고…그게 잘 되지 않으면 실패로 생각하고 실패를 운명화하면서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거대한 구조적 힘이 만들어낸 사회적 타살을 개인의 선택인 자살로 덮어버리고 있지 않은지”(이태수 보건사회연구원장) 묻는 책이다. 각종 통계와 현장 보고서가 생생하다. 문장으로 읽는 책 선택 선택인 자살 이태수 보건사회연구원장 자살 생각

2025-03-12

[문장으로 읽는 책]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나는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받은 줄도 몰랐다. ‘받은 사람이 받은 줄도 모르게 하는 것’. 그것조차 명인의 솜씨에서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할머니에게 배운 사랑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주는 평화’일 것이다. 그 사랑은 평화였다. 할머니가 나에게 무언가 잘해주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저 그분의 작은 평화 속에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끌어 안으셨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이에게 무언가 잘해주려 애쓰다가 오히려 평화를 깨뜨리고 불만과 다툼의 늪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는 나에게 평화로 가득 찬 작은 방을 주셨는데, 그 방은 영원히 내 안에 남아서 내가 힘들 때 들어가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딸을 낳고서야 작가는 비로소 할머니의 사랑을 되돌아본다. 말수 적은 “언어의 미니멀리스트” 할머니는 잘했든 못했든 “장혀”라며 등을 두들겨줬다. “뭘 잘했다는 칭찬이 아니라, 괴로운 시간들을 견뎌낸 것이 장하다는 소중한 인정”이었다. 과정에 대한 칭찬이었다.   “할머니가 베푼 관용은 나에게 심리적인 안전판이 되었다. 혹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관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믿음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의 씨앗이 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창의력의 씨앗이기도 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질문을 던지고, 반대하는 목소리에 굴하지 않고 나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할머니

2025-03-05

[문장으로 읽는 책] 레이디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버릇처럼 일만 열심히 했다. 그리고 지난 몇 달 외로움과 우울증으로 정신적 위기에 다다른 그는 목적지를 향해 가듯 저축을 했다. “목적지가 있어야 해!” 밤에 마지막으로 택시 문을 닫으면서 혼잣말처럼 내뱉어 말하곤 했다. 온종일 사람들을 목적지로 데려다주면서, 정작 그는 가구 딸린 허름한 셋방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작은 마을과 마음의 평화, 이것이 목적지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레이디스』   ‘이제까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만끽해 본 적이 없었던’ 남자는 뉴욕을 떠나 ‘잃어버린 형제애의 낙원’ 같은 작은 마을에 머물며 최고의 아침을 맞는다. 그러나 한 소녀와 가까이 지내는 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짧은 소설은 그가 이곳에서도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마을이 허물어져 내렸다.… 강이 사라질 때까지, 해가 위치를 바꿀 때까지 마을이 등 뒤에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걷고 또 걸었다. 키 큰 풀밭을 헤치며 발이 음침하게 쉭쉭 소리를 냈다.’ 단편 ‘최고로 멋진 아침’의 일부다.   영화로도 옮겨진 ‘리플리’ 시리즈와 ‘캐롤’ 등으로 유명한 ‘서스펜스의 대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초기 단편 16편을 묶은 책이다.  문장으로 읽는 책 레이디스 정신적 위기 평화 이것 초기 단편

2025-02-26

[문장으로 읽는 책] 아르헤리치의 말

모든 것이 내가 피아노를 못 칠 거라 도발했던 어린이집 남자아이에게서 시작됐다. 사람은 도전에 몸을 던지면서까지 세상에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기 원한다. 그런 게 재능이다. 어릴 때는 몰랐다. 나중에 책 『영재의 비극:진정한 자기를 찾아서』를 읽으면서 사정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상으로 잘하고 싶어 한다. 바흐가 신의 마음에 들고자 했던 것도 결국 다르지 않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아르헤리치의 말』   “우리는 재능이 과연 무엇인지 썩 잘 알지 못해요. 재능이 신의 산물인지 노력의 결과인 것인지, 그 둘 다인지 그것조차 확실히 모르죠. 나는 재능이란 노력이 따라줬을 때 원활하게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80대에도 현역인 ‘피아노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인터뷰와 단문 모음집이다. 윗 구절을 종합하면 ‘할 수 있는 이상으로 잘하고 싶은 것에 노력을 다하는 것’이 재능이라는 게 천재 피아니스트의 말이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피아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프리드리히 굴다를 인용하며 아르헤리치는 악기 안으로 깊게 들어가면 “반죽을 손으로 주물러가면서 놀 때처럼 기분이 좋다”고 표현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악기 안으로 들어가기 힘든데, 그 컨디션도 연습에 달렸다. 피아니스트가 꾸는 악몽은 무대에 올라 들어본 적 없는 작품을 연주하는 꿈이고, 한때는 오케스트라의 여자 첼리스트들이 첼로를 허벅지 사이에 끼우지 않고 두 다리를 모은 채 연주했었다는 얘기도 들려준다. 문장으로 읽는 책 피아노 여제 천재 피아니스트 어린이집 남자아이

2025-02-19

[문장으로 읽는 책] 카프카 『변신/시골 의사』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에서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갑옷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살짝 들자 아치형의 각질로 뒤덮인 둥근 갈색 배가 보였고, 배의 볼록한 곳에 걸쳐 있던 이불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몸통에 비하면 정말 형편없이 가느다란 다리들이 무수히 눈앞에서 속절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카프카 『변신/시골 의사』   아마도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도입부가 아닐까. 내가 괴물인가. 세상이 괴물인가. 부모와 여동생을 위해 일밖에 몰랐던 일벌레 그레고르가 어느 날 진짜 벌레가 돼버린 얘기. 놀라고 슬퍼하던 가족들은 결국엔 “저게 완전히 뒈졌어요”라는 파출부의 말에 안도감을 느낀다.   독일어로 ‘카프카스럽다(kafkaesk)’는 터무니없고 위협적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불안과 혼란스러움을 뜻한다. 부조리한 세계, 혹은 거대 권력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을 있을 법하지 않은 초현실적 상황으로 풀어낸 것이 카프카 문학이다. 소설가 배수아는 추천 글에서 “꿈을 문학의 한 장르로 만든 작가가 카프카”라며 “카프카는 양말을 뒤집듯 꿈과 현실을 역전시킨다”고 썼다. 8쪽 짜리 단편 ‘시골 의사’는 왕진을 나가는 시골 의사에 대한 이야기다. 초현실적인 풍경이 시선을 붙든다. 소설을 번역한 박종대는 “성적 욕망의 꿈이 만들어낸 한 편의 심령드라마”라고 소개했다.문장으로 읽는 책 카프카 변신 시골 의사 일벌레 그레고르 초현실적 상황

2025-02-12

[문장으로 읽는 책] 살아가는 책

장 아메리는 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아니고 저널리즘적 글을 쓰지만, 연구자들을 능가하는 비범함을 곳곳에서 보인다.     노년에 대한 그의 가장 빛나는 통찰은 노인들이 자기 삶을 ‘시간’으로 인식하며, ‘공간(세계)’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을 간파한 데 있다. 노인이 되면 여생을 시간으로만 받아들일 뿐 세계에 편입되어 자신이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점점 하지 않는다. 노인들은 세상이 원하는 성과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조촐한 공간으로 만족”하게 된다. 그들은 류머티즘을 앓아 산에도 못 올라가고 심장에 무리가 갈까 봐 차가운 바닷물에도 못 들어간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기 공간에서도 들어내진다. 시체가 된 채로.   이은혜 『살아가는 책』   장 아메리는 늙음과 죽음, 특히 ‘자유죽음’에 대한 통찰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작가다. 책 『늙어감에 대하여』로 잘 알려져 있다. 출판사 편집자에서 작가로 전업 중인 저자가 읽은 책 이야기다. 왕성한 독서에 기반한 촘촘한 글쓰기로 독서열을 자극한다. 가끔씩 발동하는 편집자 모드도 흥미롭다. “고통은 뭐 하나 좋을 것이 없지만, 글을 쓰게 만든다는 점에서 유일하게 좋다. 잔인하게 말하자면, 그래서 겪을 만하다.” “사실 편집자의 믿음에는 통계적 근거가 부족할 때가 많다. 다만 ‘내가 밤에 자더라도 저자는 불을 밝힐 것이다. 매 순간 새로운 사유가 출현하지 않아 초조해하거나 자기 문장이 변변찮다고 느끼며 노력할 것이다’라는 믿음을 품는다. 이런 믿음은 때로 혜성이 출현케 한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출판사 편집자 편집자 모드 글쓰기로 독서열

2025-02-05

[문장으로 읽는 책] 소녀들의 공기놀이

아이들아, 너는 이 지구별에 놀러 왔단다. 더 많이 갖기 위한 비교 경쟁에 인생을 다 바치기엔 우리 삶은 너무나 짧고 소중한 것이란다. 너는 맘껏 놀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라. 그리고 네 삶을 망치는 모든 것들과 싸워가거라. 인생은 수고(受苦)의 놀이터이니 고통받기를 두려워 말고, 고통을 공깃돌 삼아 저마다의 삶을 누리며 행복하라.   박노해 에세이 ‘공기놀이’ 중.   박노해 시인의 사진 에세이집 『다른 길』에 실린 글이다. 시인은 지난 2000년부터 20년간 낡은 만년필과 흑백 필름 카메라를 들고 지도에도 없는 중앙아시아의 작은 마을을 찾아다녔다. 삶의 ‘다른 길’을 찾아 헤맨 유랑이었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과 풍광을 짧은 글과 사진으로 모은 책이 여러 권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시인은 “간절하게 길을 찾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속에 자신만의 별의 지도가 빛나고 있다”고 썼다.   짧고 단단한 문장들이 많아 계속 밑줄을 그었다. “이 지상의 작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무너져내리면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세계는 여지없이 무너지리라.” “탐욕의 그릇이 작아지면 삶의 누림은 커지고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의 등뼈를 곧게 세우고 깃발도 없이 길을 찾아가다 보면 때로는 사람이 깃발이 되는 것이다.” 공기놀이는 세계 곳곳에서 전해오는 오래된 놀이다. 빠른 손놀림으로 돌멩이를 다루는 이 단순한 놀이에서 시인은 노동과 유희가 어우러진 삶의 에너지를 읽는다. 에세이의 앞부분은 이렇다. “파슈툰 소녀들이 공기놀이에 빠져있다.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놀이인 소녀들의 공기놀이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열매를 따고 새알을 채취한 데서 왔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공기놀이 소녀 박노해 시인 박노해 에세이 사진 에세이집

2025-01-29

[문장으로 읽는 책] 기도가 필요한 시간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마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우루과이 한 성당 벽에 쓰인 기도문에서.   그날 밤 지옥문이 열린 기분이다. 우리 앞에 느닷없는 정치와 역사의 퇴행극이 펼쳐졌다. 폭주한 망상가는 여전히 반성을 모른다. 정치 셈법에만 눈먼 정치인들도 너무 많다.   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무리 중 한 여성은 차가운 땅바닥에 몸을 굴리며 “대통령님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 마마”라고 울부짖었다. 이들을 이끄는 이는 ‘목사님’이다. 여당의 한 중진 의원은 ‘아스팔트 목사님’에게 90도 폴더인사를 했다. 세상이 도저히 공존 불가능한 사람들로 동강 난 느낌이다. 하도 어이없는 풍경의 연속이라 차라리 눈과 입을 닫고 싶다는 이들도 많다.   마냥 희망찬 인사를 주고받기조차 꺼려지는 연초, 위태로운 마음을 다스리며 『당신의 그림자 안에서 빛나게 하소서』를 펼친다. 이문재 시인이 시처럼 읽히는 기도문들을 묶은 책이다. 모든 기도는 선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갈구한다. 신학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기도의 쓰임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우루과이 성당 벽 주 기도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만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기도 시간 우루과이 성당 아스팔트 목사님 신학자 아브라함

2025-01-22

[문장으로 읽는 책] 사랑의 조건

우리가 타인과 맺는 애정 관계의 질은 우리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와 정비례한다. (…)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더 의식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는 자기도취적 행동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타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애정 어린 일이다. 최선의 자기 자신이야말로 우리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제임스 홀리스 『사랑의 조건』   사랑을 잘하려면, 내가 나와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성취하지 못한 것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려면 먼저 온전한 자기 자신(개인)이 되어야 한다. 융 학파 정신분석가인 저자는 현대인이 애정 관계에서 겪는 심리적 고통의 근본 원인을 ‘마법 같은 동반자’라는 환상에서 찾는다. 어딘가에 ‘내게 꼭 맞는, 잃어버린 반쪽’이 있으며 삶은 그를 찾아 헤매는 여정이라고 보는 오래된 착각 말이다. 사실 상대는 잃어버린 내 반쪽이 아니라 완전한 타인이며, 대부분은 자신을 상대에 투사해 ‘사랑에 빠진 나’를 사랑하는 데 머문다.   저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용기”라며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완전한 타자로 존재하도록 가만히 놔두는 ‘무심한 사랑’이라고 썼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이 사람도, 다른 어떤 사람도 내게 주지 못해.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나만 쟁취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애정 관계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찬양할 수 있다.” 양성희 / 한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사랑 애정 관계 제임스 홀리스 초월적 존재

2025-01-21

[문장으로 읽는 책] 엘뤼아르 시 선집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고/ 석탄으로 불을 피우고/ 입맞춤으로 인간을 만드는 것/ 이것이 인간들의 따뜻한 법칙이다// 전쟁과 비참함/ 죽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들의 힘든 법칙이다// 물을 빛으로/ 꿈을 현실로/ 적을 형제로 바꾸는 것/ 이것이 인간들의 유연한 법칙이다   폴 엘뤼아르 『엘뤼아르 시 선집』   오랜만에 엘뤼아르를 다시 읽는다. 1959년 한국 최초로 세계문학전집을 펴냈던 을유문화사가 2008년부터 야심차게 새로 선보인 『을유세계문학전집』의 121번째 책이다.   “창공이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불을 피웠네, / 그의 친구가 되기 위한 불,/ 겨울의 어둠으로 들어가기 위한 불,/ 더욱 잘 살기 위한 불을.”로 시작하는 ‘이곳에 살기 위하여’나 “내 초등학교 공책 위에/ 내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雪)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자유’, 양귀자 소설 제목으로도 쓰인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전문인 ‘모퉁이’까지 엘뤼아르 시 120여 편을 원문과 함께 실었다. 한국에 덜 소개됐던 초현실주의 시 등 초기부터 후기까지 두루 일별할 수 있다.   인용문은 시 ‘올바른 정의’의 부분. ‘적을 형제로 바꾸는 것이 인간의 유연한 법칙’이라는 대목에 특히 눈이 간다. “딸과 엄마와 엄마와 딸과”를 수차례 반복하는 게 전부인 ‘자장가’나 “눈의 층계/ 형태의 창살을 가로지르는/ 영원한 계단/ 존재하지 않는 휴식”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마그리트 그림이 떠오르는 ‘르네 마그리트’ 등 새로운 시들이 많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엘뤼아르 마그리트 그림 르네 마그리트 초등학교 공책

2025-01-15

[문장으로 읽는 책] 사랑의 조건

우리가 타인과 맺는 애정 관계의 질은 우리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와 정비례한다. (…)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더 의식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는 자기도취적 행동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타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애정 어린 일이다. 최선의 자기 자신이야말로 우리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제임스 홀리스 『사랑의 조건』   사랑을 잘하려면, 내가 나와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성취하지 못한 것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려면 먼저 온전한 자기 자신(개인)이 되어야 한다. 융 학파 정신분석가인 저자는 현대인이 애정 관계에서 겪는 심리적 고통의 근본 원인을 ‘마법 같은 동반자’라는 환상에서 찾는다. 어딘가에 ‘내게 꼭 맞는, 잃어버린 반쪽’이 있으며 삶은 그를 찾아 헤매는 여정이라고 보는 오래된 착각 말이다. 사실 상대는 잃어버린 내 반쪽이 아니라 완전한 타인이며, 대부분은 자신을 상대에 투사해 ‘사랑에 빠진 나’를 사랑하는 데 머문다.   저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용기”라며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완전한 타자로 존재하도록 가만히 놔두는 ‘무심한 사랑’이라고 썼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이 사람도, 다른 어떤 사람도 내게 주지 못해.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나만 쟁취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애정 관계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찬양할 수 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사랑 애정 관계 제임스 홀리스 자기도취적 행동

2025-01-08

[문장으로 읽는 책]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SNS에 엠퍼시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것은 그 플랫폼이 지나치게 인상 관리에 적합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누군가와 직접 접촉할 때와 달리 보여주고 싶지 않은 표정은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항상 무수한 청중이 있는 장소에서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나 타인에 대한 말조차 인상 관리의 일환이다. 이처럼 각자가 자기 인상의 총체적인 프로듀스로 바쁜 공간에서는 그 사람의 ‘무대 뒤’ 모습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 가지 공감력이 있다. 하나는 단순히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심퍼시(sympathy)’. 또 하나는 역지사지 타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지적인 공감력 ‘엠퍼시(empathy)’다. 저자는 극단적 갈등과 불관용의 시대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엠퍼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기 위해서는 먼저 내 신발을 벗어야 한다. 자기객관화다. ‘좋아요’가 넘쳐나는 공감의 공간인 SNS가 오히려 엠퍼시의 황무지가 되는 것도 이런 자기객관화 부재와 관련 있다.   “SNS가 일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인간적인 언어가 소용돌이치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도 익명성보다 너무도 순수하게 ‘보이는 것이 전부’인 ‘무대 앞’이기에 타인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볼 수 없어 엠퍼시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심퍼시적 ‘좋아요!’는 많이 누르지만 엠퍼시의 황야가 되기 쉬운 공간, 그곳이 SNS가 아닐까.”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신발 신어 자기객관화 부재 공간 그곳 자기 인상

2025-01-01

[문장으로 읽는 책]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나는 또 증발하고 있다/ 내가 모르는 새 시, 조금씩/ 나는 너에게 보여 주기 위한// 시// 읽는 사람의 몫이 대부분인/ 가장 무대뽀의 도둑 심뽀의/ 일/ 내가 구운 향기 나는 빵을 먹으며 내// 시// 한 편을/ 읽어 주겠니/ 오늘   최재원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그래’라고 답하고 싶은 시다. 최근 읽은 시집 중 단연 좋았다. 인용한 시는 ‘너는 시’의 전문.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격자에 맞추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찢어 떼어 놓는 데 쓰고 있다.” ‘시’라는 제목의 시도 있다. 사실 잘 알 수 없고 언어화되기 힘든 것을 시어로 만들면 읽는 사람이 제각각의 언어로 해석하는 것, 시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2021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최재원의 시집이다. 34세의 젊은 시인은 물리학과 시각예술, 그림을 전공했고 미술비평가,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비정형의 과감한 상상력은 “소년도 소녀도 아닌/ 오차도 찰나도 아닌/ 이름을 불러 주세요/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안은 여러 개지만 밖은/ 하나예요 이제 같은 길은/ 없어요” (‘백야’)처럼 이분법을 거부하는 젠더퀴어로도 이어진다. 시인은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사랑할 수 있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었다.   “~너는 달리다 말고 돌아와// 걱정 마 / 걱정 마/ 떨어진 것들 내가 하나하나// 그 길의 끝에 내가 다른 몸으로/ 너를 안아 줄게~”(‘그대여’) 시인의 위로가 따뜻하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물리학과 시각예술 미술비평가 번역가 소년도 소녀도

2024-12-18

[문장으로 읽는 책] 꼭대기의 수줍음

강이 끝났다. 10년 전쯤이던가. 압구정과 옥수 사이 구간에서 느끼는 기분에 대해 친구가 말한 적이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공포에 대한 거던가. 물속에 가라앉는 부동감에 대한 거던가. 그에 대한 시를 써 오기도 했었다. 나는 강남에 있는 걔네 집만 곱씹었다. 1호선을 타는 나는 그런 거 모르니까, 하고 별 반응 안 했다. 우리가 이웃이 되는 일은 없겠지. 먹는 사람, 자는 사람 다 있는 이 지하철 한 량 안에서 같이 머무는 동안만 잠깐 이웃인 거지. 과거의 나는 늘 생각보다 더 한심했던 것 같다. 자세하게 살지 않은 탓이다.     유계영 『꼭대기의 수줍음』   “자세해져야 한다. 자세해져야만 보이는 게 있다”라고 작가는 썼다. 압구정과 옥수 사이 계층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작가는 서문에서도 “비가 올 땐 이 많은 새들이 다 어디로 가지? 콧속이 얼어붙는 겨울밤에는 그 많은 고양이가 다 어디에 숨지? 늘 그런 게 궁금했다. 늘 그런 것만 궁금했다”고 썼다.   독창적 상상력이 매력적인 산문집이다. 삶을 자세하게 들여다본 이의 구태의연하지 않은 문장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의 매력은 무궁무진하지만 그중 제일은 자신의 혀를 콧구멍 속으로 집어넣는 유머 감각이다. 이 사실을 떠올리면 자못 유쾌해진다.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한 남자가 자신의 콧구멍 속에 손가락을 넣고 중요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한참 뒤적거리는 장면을 봤다. 소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헤매지 않았을 텐데. 인간의 무능을 확인할 때 가장 즐겁다.”문장으로 읽는 책 꼭대기 수줍음 독창적 상상력 옥수 사이 가지 콧속

2024-12-04

[문장으로 읽는 책] 멋쟁이 희극인

일부러 그 말이 듣고 싶어서 물어보거나 말을 걸 때가 있다. 나도 “아니야 너 안 못생겼어”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엄마에게 “요즘 나 최고로 못생긴 것 같다” 했더니 엄마가 말한다. 넌 언제나 나한테 최고였어. 고맙다고 엄마!!   아니야 너 안 못생겼어, 라는 말을 기대하며 엄마에게 요즘 나 부쩍 못생겨진 거 같아 했더니 엄마가 하는 말 “괜찮아, 티 안 나.”     박지선 『멋쟁이 희극인』   이런 글도 있다. “엄마에게 나의 숨은 매력은 뭐냐고 물었다. ‘예쁜 얼굴’이라고 답한 뒤, 내가 좋아할 겨를도 없이 바로 ‘그러나 너무 숨어 있기 때문에 통 보이지 않지’라고 한다.”   세상을 떠난 코미디언 박지선의 아이디어 노트 속 짧은 글들을 모은 책이다. 유쾌하지만 예민하고, 매 순간 스스로 격려하고, 무엇보다 가족과 사랑이 넘쳐났던 그의 모습이 담겼다. 그는 엄마와 함께 세상을 떴다.   “쓰레기통을 열심히 광나게 닦는 사람을 보았다. 모두가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집어넣을 때 그 사람은 그것의 입구를 광나게 닦는다. 덕분에 쓰레기통이 빛이 난다. 그 사람도 빛이 난다.” “걱정은 대체적으로 내가 하는 것보다 남이 만들어주는 게 더 많다. 걱정은 거절한다.” “나는 넘어질 때마다 무언가 줍고 일어난다.” “2월 14일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초콜릿을 산다. 집에 온다. 아빠에게 준다. -끝-”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멋쟁이 희극 멋쟁이 희극인 코미디언 박지선 아이디어 노트

2024-11-27

[문장으로 읽는 책] 마지막 왈츠

인류 최초의 이야기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인류에 남아 있는 이야기 중 가장 오래된 이야기의 중심축이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랑 이야기가 인류 최초의 서사일 것이라 짐작한 나의 사고방식도 어쩌면 로맨틱 러브 중심의 현대적 분위기에 물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목숨까지 바칠 만한 격정적인 사랑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서양에서는 아벨라와 엘로이즈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유행했던 12세기경이니, 인류 역사 전체에서 사랑이 이토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 셈이다.     황광수·정여울 『마지막 왈츠』   1944년생 황광수와 1976년생 정여울. 두 문학평론가가 나눈 문학적 교감과 우정에 대한 에세이집이다. 병석의 황광수를 대신해 정여울이 두 사람의 대화를 정리했다. 황광수는 책이 나오기 직전 세상을 떴다. “44년생 황광수와 76년생 정여울은 어떻게 이토록 절친한 벗이 되었을까요. 우리 사이엔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우리의 우정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었으니까요.” 단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직감적으로 서로의 눈빛을 알아보았지요. 우리 두 사람 모두 ‘같은 대상’을 향해 미쳐 있음을. 그것은 ‘문학’이었습니다.”   ‘결혼 아니면 이별’처럼 종착역이 분명한 사랑과 달리 우정은 끝도 목표도 없는 ‘무쓸모의 관계’다. 정여울은 서문에서 “인류는 끊임없이 적이 될 수도 있는 타인을 친구로 만들며 세파를 견디고 변화에 적응해 왔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고 썼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왈츠 사랑 이야기 마지막 왈츠 인류 역사

202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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